한동안 모바일 게임의 거침없는 성장세에 밀려 주춤했던 PC와 콘솔 게임 시장이 완벽한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글로벌 PC 게임 유통 플랫폼 스팀(Steam)의 폭발적인 매출 지표가 이를 증명한다.
미국 IT 전문 매체 테크스폿에 따르면, 스팀은 지난 12월 전년 동기 대비 22.7% 증가한 16억 달러(약 2조 3000억 원)의 매출을 올리며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게임 인구가 급증했던 2020년 12월의 14억 달러를 가볍게 뛰어넘은 성과다. 통상적으로 연말이 대규모 할인 행사가 겹치는 성수기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5년 만의 사상 최고치 경신은 시장의 흐름이 바뀌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같은 기간 스팀 월간 활성 이용자 수 역시 1억 명을 돌파하며 플랫폼의 압도적인 체급을 과시했다.
이러한 흥행 돌풍의 중심에는 넥슨의 자회사인 스웨덴 개발사 엠바크 스튜디오가 내놓은 익스트랙션 슈터 신작 ‘아크 레이더스’가 자리 잡고 있다. 게임 시장 조사업체 알리네아 애널리틱스는 이 게임을 이번 스팀 매출 성장의 핵심 동력으로 지목했다. 20% 할인이 들어간 박싱데이(12월 26일) 단 하루에만 25만 장이 팔려나갔고, 작년 12월 21일부터 이달 5일까지 총 120만 장이 판매되며 해당 기간 스팀 최다 판매작 1위에 등극했다. 넥슨 측에 따르면 출시 2개월 만에 글로벌 누적 판매량은 1240만 장을 넘어섰고, 최고 동시 접속자 수는 96만 명에 달한다.
신작의 약진뿐만 아니라 구작들의 역주행도 눈에 띈다. 2018년 출시된 퀸틱 드림의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은 90%라는 파격적인 할인을 통해 가격을 4달러로 낮추자 단 2주 만에 99만 3000장이 팔렸다. 지난 7년간 누적 판매량의 7%를 단기간에 채운 셈인데, 탄탄한 완성도를 갖춘 명작에 대한 게이머들의 수요가 여전히 뜨거움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드웨어의 진화가 불러온 시장 지형도 변화
시장 조사 업체 뉴주(Newzoo)가 발표한 ‘2025 글로벌 게임 마켓 리포트’를 보면 전 세계 게임 시장 규모는 약 1888억 달러(약 278조 5000억 원)로 집계됐다. 여전히 모바일 게임이 전체의 55%를 차지하며 과반을 점유하고 있지만, 그 성장세는 눈에 띄게 둔화되었다. 반면 PC 시장은 스팀의 중국 내 영향력 확대와 맞물려 덩치를 키웠고, 콘솔 시장은 ‘닌텐도 스위치 2’ 같은 신형 기기 출시의 수혜를 입으며 성장세를 굳혔다.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부분은 하드웨어 폼팩터의 진화다. 2022년 스팀덱(Steam Deck)을 필두로 UMPC(휴대용 PC)가 대중화되면서, 무거운 데스크톱 앞에 앉아야만 즐길 수 있던 PC 게임이 모바일 게임처럼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생활 밀착형 콘텐츠로 진화한 것이다.
국내 주요 게임사들 역시 이러한 시장 흐름에 발맞춰 PC와 콘솔을 아우르는 굵직한 멀티플랫폼 대작들을 쏟아낼 채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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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씨소프트: 올 하반기 글로벌 출시를 목표로 붕괴된 미래의 서울을 배경으로 한 오픈월드 택티컬 슈터 ‘신더시티’를 개발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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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마블: 그간 모바일 게임에 주력했던 기조에서 벗어나, 하반기 출시를 타깃으로 한 ‘이블베인’을 통해 PC·콘솔 시장 진입을 적극적으로 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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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어비스 & 크래프톤: 펄어비스는 오랜 기간 공들인 기대작 ‘붉은 사막’을 올 3월에 선보이며, 크래프톤은 ‘서브노티카 2’로 포트폴리오를 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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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슨: 이미 작년 3월, 하드코어 액션 RPG ‘퍼스트 버서커: 카잔’을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바 있다.
밸브의 진짜 승부수: 1,049달러짜리 스팀 머신이 아닌 ‘스팀OS’
이처럼 PC 게임 생태계가 르네상스를 맞이한 가운데, 플랫폼의 절대강자 밸브(Valve)의 하드웨어 전략은 다소 묘한 궤적을 그린다. 오랜 시간 베일에 싸여 있던 새로운 ‘스팀 머신(Steam Machine)’이 마침내 예약 구매자들에게 배송을 시작했지만, 시장의 반응은 다소 미적지근하다. 대기열은 끝이 보이지 않고, 시작가만 1,049달러에 달해 게이머들의 텐션을 끌어올리기엔 진입 장벽이 꽤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밸브가 쥔 진짜 핵심 패는 값비싼 완제품 하드웨어가 아니다. 자사의 리눅스 기반 운영체제 ‘스팀OS(SteamOS)’를 더 넓은 서드파티 PC 생태계로 개방하고 있다는 점이 훨씬 더 파괴력 있는 뉴스다.
최근 배포된 스팀OS 3.8 버전의 업데이트 내역을 보면 인텔과 AMD 플랫폼에 대한 호환성 개선이 뚜렷하게 명시되어 있다. 현재 밸브가 공식적으로 OS 설치를 지원하는 기기는 레노버 리전 고 S, 스팀덱, 스팀 머신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스팀OS 설치 페이지에는 ‘타사 AMD 기반 핸드헬드’ 및 ‘AMD 외장 GPU’ 시스템에 대한 베타 지원이 공식화되었다. 이는 스팀OS의 하드웨어 지원 범위가 폭발적으로 넓어지고 있음을 방증한다.
밸브의 개발자 피에르-루 그리페(Pierre-Loup Griffais)는 최근 블루스카이를 통해 “AMD GPU를 가지고 있다면 이제 당신만의 스팀 머신을 직접 구축할 수 있다”며 “현재 더 많은 GPU 지원을 위한 작업이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엔비디아와도 긴밀히 협력해 전담 팀을 꾸렸다고 덧붙였는데, 비록 엔비디아 지원이 2026년 내에 완벽히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그 방향성만큼은 흔들림이 없다.
물론 윈도우 11 옆에 스팀OS를 손쉽게 깔 수 있는 대중적인 ‘설치 마법사’가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최신 베타 버전을 만져야 하고 AMD 그래픽 카드가 필요하다는 제약이 있다. 그러나 태생이 개방형인 리눅스 배포판의 특성상, 이미 많은 하드웨어 애호가들이 복잡한 설정을 거쳐 비공식 기기에서도 스팀OS를 훌륭하게 구동하고 있다. 밸브 역시 이러한 설치 과정을 간소화하는 데 속도를 내고 있어, 윈도우 11을 위협할 강력한 게이밍 OS로 자리 잡을 날이 머지않아 보인다.
밸브가 이토록 OS 개방에 공을 들이는 속내는 무엇일까. 2013년 서드파티 제조사들과 협력해 내놓았던 1세대 스팀 머신은 리눅스 호환 게임이 턱없이 부족해 처참한 실패를 맛봤다. 하지만 지금의 스팀OS는 자체 하드웨어인 스팀덱을 거치며 대부분의 윈도우 게임을 매끄럽게 구동할 수 있을 정도로 극도의 완성도를 갖췄다.
여기에 밸브가 직면한 공급망 이슈도 한몫을 하고 있다. 그리페에 따르면 현재 RAM 공급업체들이 밸브에게 “이 가격이 아니면 팔지 않겠다(take it or leave it)”며 배짱 장사를 하고 있어 자체 하드웨어의 생산 단가를 맞추는 데 골머리를 앓고 있다.
결국 밸브의 영리한 선택은 유저들이 거실에 스팀 전용 게임기를 두기 위해 되팔이들과 싸우거나 비싼 값을 지불하게 만드는 대신, ‘게이머가 이미 가지고 있는 PC’를 커스텀 스팀 머신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우회로를 열어준 것이다. 1,049달러짜리 스팀 머신이 몇 대 팔리느냐는 밸브에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진정한 승리는 전 세계 게이머들의 기존 PC에 스팀OS가 스며드는 그 순간 완성될 테니까 말이다.